Pink Identity vs Black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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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가 S 그룹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갈 때 받았던 공지 이메일의 한 문장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치마 정장은 남사우들의 음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삼가 주십시오.

미친 거 아냐!! 경악은 잠시뿐, 온통 여성스러움(말하자면 Pink Identity)밖에 갖고 있지 않던 친구는 난데없이 없는 바지정장을 사러 온 백화점과 동대문을 다 돌아다녀야 했더랬다.

닮고 싶은 ‘언냐들’이 이렇게나 많은 조직이라니, 나는 복받았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팀장 손님에게 커피 심부름 할 일도 없고, 팀 전체의 영수증을 처리하며 내가 대학은 왜 나왔니 욕할 일도 없으며, 술자리에서 업소에서 나온 언니인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인지 구분 못하는 상사도 없다. 일이 많아 퇴근을 못할지언정 차수 높여가며 단란함을 과시하고, 그 방법 외에는 스트레스 풀 줄 모르는 아저씨들도 없다.

오래 고민했고, 아직도 고민 중이다. 어짜피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남성성의 세계이니, 그들의 룰에 나를 맞추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보일 수 있는 여성성(Pink Identity)은 최대한 죽여야 한다고 여겼다. 블랙 수트에 바지 정장, 스커트를 입어야 한다면 무릎까지만, 엉뚱한 시선으로 보여져봤자 좋을 거 없다고.

남자들은 친해지면 술자리에서 형,형님, 잘도 부르는데 나는 회사 선배를 언니라고 부르면 안되나 어찌보면 사소한 고민도 했다. 왜 남자들에겐 형****이라는 높임말이 있는데 여자들에겐 언****이 없는 거야 헛소리 해가며.

나는 울 상무님이 패셔너블해서 좋다. 가끔 내가 IT가 아니라 패션이나 뷰티 인더스트리로 들어온 게 아닌가 착각하게 될 정도. “옴마나, 저 원피스 엊그제 잡지에서 본건데 열라 잘 소화하셨구랴.” 속으로만 말하고 앉아 있는 시츄에이션. 첫 직장에서 두께가 넓은 헤어밴드와 블랙 컬러 네일, 초록색 구두를 신었다고 HR에서 ‘앞으로도 그러고 다니실 거에요?’라고 야단 맞았던 것에 비하면, 동시대의 조직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 싶다.

여성이 여성이 아닌 다른 성별이 되어야만 했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나는 상무님을 볼 때마다 그녀가 Pink Identity를 버리지 않고도 성공한 선배가 되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가끔씩 내 닮고 싶은 ‘언냐들’이 나는 일을 잘 할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닐까, 남성 동지들 보다 ‘버티려는’ 근성이 약한 게 아닐까 고민하는 것을 볼 때 다 지나가리라 말하고 싶다.

언니 없이는 못 버틸 철 안난 울 팀 소년들을 위하여, 부디 Cheer you up!

한성은
한성은
데이터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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