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에 대하여

금요일 밤부터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울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으나, 과거의 관계에서 배운 한 가지는 이런 예감이 들었을 때 내가 노력한다고 나아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여우 9단짜리 언니들의 가르침은 내게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걸 동원할 수는 없는 일.

눈이 떠지지 않을 때까지 울면서, 잘 사랑하고 잘 헤어지는 일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를 두고 가버린 사람과, 내가 두고 떠나온 사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방법을 다 해 붙잡으려고 노력했던 사람과, 나를 잡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자주 일어나지 않고, 또한 얼마나 애처롭게 짧은 시간 안에 바래지는지도.

헤어지는 장면 중 가장 좋은 건 호수 옆이었다. 자기 편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남자를 의리도 예의도 없이 버리려는 나에게 그는 여기 말고 다른 장소에서 헤어지자고 제안했다. 헤어지는 장면이라도 좋은 그림이었으면 한다고. 긴긴 시간동안 서로 주고 받은 상처가 수도 없지만(주로 강타를 날린 쪽은 나였다), 좋은 이별이었다. 헤어졌으되 계속 그가 잘되기를 응원하고 기도하는. 아마도 그도 나를 생각할 때 마찬가지일거다(라고 맘대로 착각한다). 감정의 업다운이 심한 나를 그는 긴 시간동안 잘 다독여 주었고, 문제가 있으면 함부로 놓지 않고 늘 풀려고 노력했다. 내 이십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흉터 많은 인간으로 나이들지 않았을까. 이제와 생각하니 그 어리광과 떼쓰기, 의존하기 등등을 받아주었던 게 감사하다.

가장 나쁜 이별 장면은 배경이 없다. 구구한 설명이 없다. 문자도 전화도 메일도 없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연락이 끊어진다. 너를 사랑했지만 유효기간이 다한 것 같다고 이제 너를 봐도 어저꾸 저쩌구 하는 뻔한 문장도 없다. 거꾸로 물을 뿐이다. 너, 연락 없는 걸 보니 헤어지자는 말로 알아 들을게. 안녕.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정리하려면 눈물이 배로 든다.

잘 사랑하고 헤어지기란 너무 너무 너무 어렵다. 아직 잘 사랑해서 평생 사랑하게 되어 본 적이 없으니, 내가 할 줄 모르는 건 이야길 못하겠고,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할 때 들이는 노력의 약간만이라도, 헤어질 때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은 학교에서 헤어질 때의 예의 같은 걸 교양으로 가르쳐야 되는 게 아닐까 뻘한 상상도 해본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비슷한 장면이 가까운 미래에 있을 것 같아 두렵고 겁난다.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날 시작하고 믿게 만들었으면서. 혹 당신 뜻이 그러하다면 부디 예의바른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얼굴을 마주하고. 정 안되겠으면 열 문장 이상의 편지로. 최대한 사실적인 표현을 담아 미련 따위 안 남길 수 있도록. 가장 좋은 건 내 예감이 틀리는 거지만….

엊그제 후배의 말에 식겁했다. 그 놈 말하길, 자긴 어장관리 당하는 게 좋다며 부담스럽지 않고 좋지 않냐고 했다. 또 다른 후배 말하길 자긴 요새 너무 바빠서 이미 남자친구 있는 여자가 세컨드로 자길 만나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고, 음식 만들때도 자꾸 간보면 막상 다 만들었을 때 맛이 없단 말이다. 어른들은 많이 만나보라며, 그래야 사람보는 눈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냥 자극의 역치만 올라갈 뿐인 거 같다.

어짜피 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 나는 또 노력이나 하고 있을 예정이다. 어쩌면 내 남자보는 눈을 바꾸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데, 그게 잘 안되니까 문제다. 이제 내 맘 내 감이 끌리는 남자면 우선 의심부터 하고 봐야하는 걸까. 당신, 내 질문에 분명하게 약속하지 않을 때 왜 나는 당신을 버리지 못했을까. 혹은 왜 나만 바라보며 안달하는 남자를 나는 사랑할 수 없었을까. 그렇게 울고도 아직 속이 너덜거린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을텐데. 매번 최선을 다해 빠지고 최선을 다해 상처받고 있는 내가 한심할 뿐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의 아이러니가 모두 내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남자 취향이 내가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가지지 못한 것의 대리만족은 아닌지 생각했다. 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내가 이룰 일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남자와 그를 좌지우지하는 여자의 롤플레이는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닌 거 같다. 눈물을 두 바가지쯤 쏟아낸 후에야, 무능력을 인정하겠어요. 퉁퉁 부은 눈으로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아, 미련한 곰같으니.

한성은
한성은
데이터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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