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불출입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건 기쁜 동시에 겁나는 일이다.

저 길 좋아보인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삶을 보면 ‘으악 내가 뭔가 된통 잘못한 게 아닐까?’ 하고 그 때 훈수 괜히 뒀나 후회를 한다.

이런 훈수 중에 젤로 묵직했던 일은 동생의 입시였다. 격하게 압축하면 글을 쓰고 싶어하던 녀석을 국문과가 아닌 영화학과를 가게 만들었다. 글을 쓰던 영화를 찍던, 등 따시고 배부른 날 오기가 쉽지 않다는 건 공통이다. 하지만 적어도 국문과를 갔으면 교직이수로 선생질이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하며 자주 미안했다.

가장 미안한 점은 동생이 내 욕심을 대리하게 했다는 거였다. 세상 어느 누가 영화나 음악을 싫어한다고 대답하겠냐마는, 나는 좋은 걸 좋다고 강하게 쫓지 못하고, 신방과 정도에서 타협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동생의 학교와 전공을 얘기하면서 대리만족을 해왔다.

옆에서 지켜보니 동생 말마따나 영화는 ‘민폐의 예술’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영화가 만들어지고, 대부분은 예술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민폐에서 끝나고 말았다. 밤샘 촬영을 하고 들어와 골아떨어지는 녀석을 보거나, 한 겨울에도 열이 넘쳐 늘 반소매를 입던 녀석이 무려 내복을 챙기고, 무릎까지 바람이 들어온다고 하면 맘이 영 시려웠다.

시려워도 별 수 있나, 그의 학교생활과 연애지사,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졸업작품으로 촬영한 영화가 칸에 갔다.
단편 영화 부문인 씨네 파운데이션. 1,589편의 단편 중에 16편이 선정되었다. 그 16편 중에 다시 3편 안에 들었다는 소식. 심사위원이 미셸 공드리.

감독은 집에 와서 가끔 자고 가던 동생의 학교 동기인데, 제대로 인사해본 기억은 없고, 그 친구가 공급해 준 모 브랜드의 샴푸를 매일 몹시 감사한 마음으로 쓰고 있는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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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웹사이트 스크린 캡쳐 🙂 링크는 여기.

네이버 영화팀에 있는 다운 언니에게 영화 소개를 넘겨 DB를 미리 채워놓고, 턱시도를 대체할 양복과 구두와 보타이를 사주고, 스마트폰을 넘겨 주고 부산스러웠다. 상 탔다고 온 문자에 펄쩍거리며 기뻐했지만, 여기 저기 썼듯 영화는 감독의 영광, 사업은 사장의 영광. 동생의 이름은 기사에 없었다.

우리를 분발케 하는 동인 중 가장 평범한 건 anonymous에서 famous가 되고 싶은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네가 스토리텔러라기 보단 테크니션이고, 감독보다는 촬영감독을 하고 싶어한다고 짐작해왔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아무개 감독 작품, 이라고 네 이름 박힌 포스터는 기대하기 힘들지도. 중요한 건 본인이 원하는 길을 분명한 마음으로 가는 거다.

레쥬메 첫 줄을 무려 칸으로 시작하게 되는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은 이제 지워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맘 놓고 팔불출 놀이를 하기로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사내에게 받은 연서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글을 준 사람이고, 심야 영화 또는 심야 와인에 좋은 동반자이며, 역시 심야에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는 헛소리에도 군말 보탠 적 없이 사다주는 친절한 동생이다.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좀 멀리 온 사람이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일과 그가 잘하는 일이 계속 같은 길 위에 놓이길 기도하며,
아 정말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한성은
한성은
데이터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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