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회고
이직했다.
이 네 글자 안에 많은 일과 다양한 감정이 있다.
2016년
- 미국으로 이사할 땐 여기서 내 자리를 찾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처음엔 지쳤던 차에 쉴 수 있게 되니 평화롭고 안온하여 좋았고, 롱디 커플이 더 이상 전화기를 붙잡고 들려? 안 들려?를 안해도 되니 좋았다.
2017년
- 이력에서 가장 긴 시간을 출근과 퇴근을 않고 살아보니 숨이 안 쉬어 지더라고 적게 됐다. 점점 우울감이 심해졌고, 반려인이 퇴근해서 올 시간까지 끼니 거르고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거나 끝없이 잠만 자는 날이 많아졌다.
2018년
- 지켜보던 반려인은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어도 괜찮다 했고, 그렇게 우리한테 나나가 왔다. 정해진 시간이면 꼬박꼬박 밥 달라고 보채는 털생물이 곁에 있으면서, 나는 서서히 생활을 회복할 수 있었다. 새벽잠을 내주고 루틴을 얻었달까.
- 코딩 부트캠프를 끝냈고, 워싱턴주에서 개인사업자를 등록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일을 받아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2019년
- 학사 편입했던 컴공 과정을 졸업하고 조지아텍 석사 과정을 (무려 재수하여) 시작했다.
2020년
- 폴이랑 같이 일하게 되었고, 거의 동시에 판데믹이 시작되었다. 폴이랑은 이미 서로가 모지리(?)인 걸 아는 사이여서 엄청나게 새롭진 않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안전감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었는데), 일하면서 다른 엔지니어, 특히 나라와 그랩을 알게 되어 서로 고민을 나누고 공부를 같이 할 수 있어서 좋았다.
- 코비드 때문에 심플스텝스가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덕분에 심스에서 진행한 부트캠프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personal branding statement 만들었던 게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 AC2에서 처음으로 멘토를 신청해서 경력 초반인 개발자 두 명을 1-2주에 한 번씩 만났는데, 당시에 막 토스로 이직한 친구가 해 준 말이 힘이 되었다. “몇 번을 떨어져도 어쨌든 하나만 되면 끝나는 게임이니까요”
2021년
- 나라가 1기로 듣고 추천해줘서 그랩이랑 같이 프로그래머스 데이터 엔지니어링 스터디를 들었다. 스터디하면서 그동안 더벅더벅 알 게 된 것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디다 물어볼 데 없이 혼자 찾고 삽질하면서 만든 것들이 아주 거지같이 한 건 아니었구나를 확인하면서 약간 자신이 생겼다.
- 스터디를 리드하셨던 기용님이랑 1:1 할 때 공부 그만하고 일하라고 하실 때 내 상태가 자각이 되었다. 떨어지고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남들이 알만한 좋은 회사는 가지 못할 게 두려워서, 공부한다는 핑계를 걸어놓고 제대로 미국 잡마켓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정말, 제대로 하는 건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 어쩌면 같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는데 접수가 될 타이밍이기도 했고, 메신저가 좋기도 했고.
- 그리고 봄 무렵부턴 spray & pray 모드. 예전엔 JD를 꽤 꼼꼼히 보고, 90% 이상은 만족해야 쓸까말까 했는데 이 때부터는 쓱 살펴보고 대강 나랑 비슷한 거 몇 문장만 있어도 지원했다. 트위터에서 어느 분이 말씀하신, achievement 이야기할 땐 스스로가 20대 백인 남자 Sean이라고 생각하고 쓰라는 말도 자주 떠올렸다. 스크리닝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리크루터와 하이어링 매니저가 할 일이지. 아니다 싶음 연락 안 하겠지. 어짜피 저 JD도 누가 쓴 거 많이 베껴쓴 거고, 이런 거 다 있으면 좋겠다 싶은 이상형 월드컵 같은 거잖아. 나라고 뭐 사람 안 뽑아봤겠니.
- 지원할 회사에 맞춰서 레쥬메를 고쳐쓰고 이런 수고로운 짓도 그만 뒀다. 마케팅이나 PM 같은 직군이라면 모르겠는데, 엔지니어의 레쥬메가 그 정도로 커스터마이징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짜피 내가 써 본 적 없는 기술인데 JD에 맞춰서 가라로 넣을 수도 없는 거니까. 레쥬메를 PDF로 저장해서 폰에 넣어 놓고, 자려고 누웠을 때 핸드폰 하는 시간에 3-5개 정도를 꼬박꼬박 지원했다. 파이프라인은 노션으로 트래킹했다. 어짜피 내가 경쟁을 컨트롤 할 순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Upper funnel을 늘려서 확률을 늘리는 것 뿐.
- 이 무렵부터는 영어도 놔버렸다. 아 몰랑, 못 알아듣겠으면 말라그래. 예전엔 막 스크립트도 적어보고 할 말 불렛포인트로 미리 정리하고 준비했었다면, 이 즈음부터는 긴장은 해도 준비는 하지 않았다. 너나 나나 집에 갖힌 채 미쳐버릴 거 같은 1년인데 새로 사람 얼굴 보거나 목소리 듣고 다른 사람과 커넥트한다는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물론 적어보고 불렛포인트로 정리해본 시간들이 충분히 쌓여서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초반엔, 1순위로 가고 싶은 회사보다는 걍 버려도 되는 카드를 많이 지원해서 연습하는 게 좋은 것 같다.
- 알고리즘 인터뷰는 여전히 잘 못 보고 많이 떨어졌는데, 이게 준비되길 기다리면 평생 안될 거 같아서 그냥 계속 봤다. 딱히 릿코드를 열심히 풀어보고 그러지도 않았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대학원 수업듣고, 집안일하면서 마루바닥이 발바닥에 달라붙지 않게 건사하는 것만 해도 시간과 에너지가 늘 모자랐다. 다행인 건 요새 점점 미국은 릿코드 스타일의 코딩테스트나 화이트 보딩 인터뷰는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고, 테이크홈으로 과제를 주거나 코딩테스트나 라이브 코딩 인터뷰를 보더라도 실제로 현업에서 짤 일이 있을 법한 상황을 주고 작은 프로그램을 짜보게 하는 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데이터는 부족. 그냥 내가 본 회사들은 그랬다고. 뭐 하지만 구글도 이제 릿코드 스타일 인터뷰 금지한다는 말도 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긴 아닌 거 같다.
- 심스에서 한 SQL 스터디도 도움이 됬다. 일하다 보면 쓰는 것만 쓰게 되고 잊어버리는 것도 많은데, 먼지를 털고 말려놓으니 쓸모가 매우 있었다.
회고랍시고 적고 나니 아, 장사 하루 이틀 하나, 뭐 애도 아니고 이게 어렵다고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생각보다 매우 허약해서,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사이클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한참 다크할 때, 바다 건너에서도 상태 안 좋은 걸 눈치채고 되풀이로 콜을 잡아가며 챙겨 준 친구들이 고맙고, 이후엔 회사와 스터디 등에서 만난 관계들이 서포트 네트워크가 되어 주었다. 고립되지 않는 거 진짜 중요하다.
뭐라도 배우면 건지는 게 있겠지 하며 허덕일 때, 아 다 그냥 그만두고 주부로 사는 건 어떨까도 상상해봤는데… 말을 말자. 그렇게 힘들어지면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30년을 경력 단절된 채로 살며 오만 쓸데도 맥락도 없어 보이는 것들을 배우고 자격증을 모으던 임여사의 등을 떠올렸다. 그 자격증 중 하나가 지금 환갑이 넘은 엄마를 일하게 하는 셈이니, 나도 엄마만큼은 할 수 있겠지.
코비드가 내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시애틀의 스타트업씬은 그렇게까지 활발하진 않은데, 판데믹 이후 많은 회사가 Remote First로 전환하면서 주로 스타트업 위주로 지원하던 나는 기회가 오히려 늘어났다고 느꼈다.
새 회사의 동료들은 나보다 열 살은 어린데, 또 어떤 동료는 정확히 내 부모님 연배다. 팀원 중 한 명은 원래 직업이 헤어스타일리스트였어서 나 정도의 커리어 체인지는 명함도 내밀 수 없겠더라.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마흔 넘은 나이에 이런 피벗이 가능할까 의문. 또 한 가지, 그런 걸 묻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만, 쿠션을 먹여서라도 아무도 나이를 묻거나 자녀 계획을 묻지 않고, 또 물을 수 없다는 게 참 좋았다.
결국 인터뷰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풀어도 누구는 엄청 감동하는 얼굴로 들어주고, 누군가는 심드렁하다. 예를 들어, 보통은 왜 커리어 체인지를 하게 됬냐고 물으면 약간 모범답안식의 대답을 했는데, 어떤 날은 또 너무 영혼의 소리가 나와버리는 것이다. 아 솔직하게 말해도 됨? 너님 보시다시피 영어가 짧은데, DA나 DS는 분석한 후에 결과를 설명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이슈 셀링하는 게 내 생각엔 일의 절반은 되는 거 같단 말야? 안되겠더라고… 영어가 느는 것보다 코딩이 느는 게 빨랐어. 이런 이야길 하면 누구는 박장대소하며 들어주고, 누구는 썩소를 짓는다.
더불어 나 원래는 엔지니어링 스쿨에 가고 싶었고 합격한 학교도 있었는데, 아빠가 엔지니어는 여자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못 가게 했어. 엄청 돌아왔지만 이제 내 자리에 온 기분이 들어. 이런 소릴 하면 누군가는 너무 안타까워 하며 들어주고, 누군가는 얘 또 여자 운운 하는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반응은 듣는 사람의 성별이 뭐냐에도 별 상관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좋게 들리는 대답을 하기보다 정말 내가 생각한 그대로 말하려 애썼다.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의미없다고.
또 하나 그동안 했던 것과 다르게 한 점이라면, 스카이프 넘버를 사서 인터뷰용으로 따로 썼다. 스카이프로 전화를 받으면 자막 기능을 켤 수 있어서 약간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인터뷰할 땐 긴장이 되면서 내 IQ - 20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느낌인데, 뒤늦게 자막을 보고 아 이 소리군, 하고 대답한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사실 그냥 방금 뭐라 그랜? 하고 다시 물으면 되는 거지만. 소심스트 소셜클럽 멤버에겐 도움이 되니 혹시 영어가 아주 편하지 않은 분들은 써보셔도 괜찮을 팁.
가끔은 어떤 일이 이미 일어난 후에 돌아보는 일이 뭐 그리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현재에 서서 과거를 보니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릴 땐 막막하고 불안했으니까. 이런 종류의 글들은 다 나중에 재구성된 무엇이고, 그 순간의 불안과 좌절을 다 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