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약, 두 개의 경고문
Perimenopause(폐경 이행기)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시작한 게 얼마 전이다. 증상 이야기를 자세히 할 생각은 없고, 여튼 호르몬 치료라는 걸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영어로는 HRT라고 부른다.
검색을 하다 보니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같은 걸 찾는데 영어 콘텐츠와 한국어 콘텐츠의 온도차가 심했다.
영어로 검색하면 FDA가 20년 넘게 붙어 있던 경고문을 뗐다는 뉴스가 먼저 나온다. 처방이 몰려서 패치가 품귀라는 기사까지 있다. 한국어로 검색하면 유방암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5년 넘기지 말라, 최소 용량으로 짧게 쓰라, 그 뒤엔 다른 걸로 바꾸라.
처음엔 뭐가 맞는 겨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다만 가리키는 시점이 다르다.
미국 FDA는 올해 2월 12일, 폐경 호르몬 제품 여섯 개의 라벨 수정을 승인했다. 심혈관질환, 유방암, 치매 위험에 대한 문장이 경고문에서 빠졌다. 미국에서 지워진 그 문장들이 한국 라벨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느낀 온도차는 기분 탓이 아니었다. 라벨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이 문장들의 출처는 하나다. 2002년 WHI(Women’s Health Initiative) 연구. 폐경 여성 16,608명을 추적하던 이 연구는 유방암 위험 증가를 이유로 예정보다 일찍 중단됐다. 전 세계에 뉴스가 났고, 직후 미국에서 호르몬 처방이 무너졌다. 한국어 설명서의 문장들도, 미국이 올해 지운 문장들도 전부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 연구를 뜯어보면 지금 상황과 어긋나는 데가 많다. 참가자 평균 나이가 63세였고 3분의 2가 이미 60세를 넘긴 상태였다. 폐경 증상 때문에 치료를 시작하는 나이대가 아니다. 쓰인 약도 요즘 선호되는 조합이 아니었다. 그리고 숫자가 있다. 위약 그룹에서는 한 해 유방암이 1만 명 중 30명 나왔다. 호르몬 그룹에서는 38명. 1만 명 중 8명이 더 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고, 30이 38이 됐으니 26% 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숫자다. 뉴스에 실려 20년을 떠다닌 쪽은 26%였다. 26%는 큰일 날 소리 같고, 1만 명 중 8명은 좀 덜 무섭지 아니한가.
이번 라벨 수정에서 빠진 것 중에는 “최소 유효 용량을 최단 기간” 쓰라는 지시문도 있다. 대신 폐경 10년 이내 또는 60세 이전에 시작하는 경우에 대한 안내가 들어갔다. 자궁내막암 경고는 그대로 남았다. 전부 지운 게 아니라 항목별로 다시 정리한 셈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이 좀 웃프다. 처방이 몰리면서 이제는 패치가 모자란다. 20년 동안 안 쓰다가, 지금은 없어서 못 쓴다. 주변이나 레딧에서 패치를 써본 사람들 후기를 보면 우울감이나 무드 스윙이 줄었다, 화가 줄었다, 몸무게 늘던 게 멈췄다 같은 얘기가 많다.
약은 그렇다 치고, 미국에서도 의사를 만나면 HRT를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를 찾다 보니 2019년 서베이가 하나 나온다. 가정의학과, 내과, 산부인과 레지던트 177명에게 폐경 환자를 볼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물었더니 12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6.8%다. 2002년 이후 처방이 사라졌으니, 그 뒤에 수련받은 의사들은 이 약을 써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공백이다.
한국 상황은 어떤가.
서울대병원 안내에 따르면 국내에 허가된 호르몬 대체요법 제제는 정제, 겔제, 질좌제다. 패치는 목록에 없다. 미국에서 지금 품귀가 난 바로 그 물건이 한국에는 아예 없는 것이다. 겔은 있지만 동네 산부인과가 다 취급하지는 않아서, 갱년기 클리닉이나 대학병원 쪽을 찾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가격 차이도 무시 못 한다. 급여가 되면 한 달 본인부담이 5천 원 안팎인데, 비급여는 5만 원 수준이라는 자료가 있다. 열 배 차이면 처방하는 쪽도 받는 쪽도 당연히 먹는 약부터 찾게 된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한국어 콘텐츠가 위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가 이해됐다. 겁주려고 지어낸 게 아니라, 옛 라벨을 정확하게 옮겨 적은 것이다. 5년 넘기지 말라, 최소 용량으로 짧게 쓰라는 말은 실제로 라벨에 적혀 있던 지시문이다. 국내 의학 전문지들은 FDA 발표를 이미 다뤘으니 전문가 쪽은 따라가는 중인데, 블로그와 커뮤니티는 아직 2000년대에 있다. 정보가 틀린 게 아니라 갱신 속도가 언어마다 다른 것이다.
여기서 끝내려고 했는데, 자료를 볼수록 그 앞에 더 큰 이야기가 있었다.
1977년, 미국 FDA는 가임기 여성(15세에서 49세)을 초기 임상시험에서 제외하라고 권고했다. 배경에는 탈리도마이드가 있다. 1950년대 말 유럽에서 나온 약인데, 입덧에 듣는다며 임신부에게 팔렸다. 태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제대로 시험하지 않은 채였다. 이 약을 먹은 임신부들이 팔다리가 짧거나 없는 아기를 낳았고, 수천 명이 그렇게 태어났다. 문제는 임상 시험을 안 한 것이었는데, 대책은 시험에서 여성을 빼는 쪽으로 갔다. 임신 가능성이 있는 몸에 검증 안 된 약을 넣지 말자는 논리였다. 그렇게 가임기 여성을 다 빼다 보니, 의학이 남성 몸을 기본값으로 놓고 쌓였다. 이 권고가 뒤집힌 게 1993년이니 이제 삼십 년 남짓이다. 지금도 미국 NIH 예산에서 여성 건강 연구는 10% 안팎이고, 그 안에서 폐경 연구는 1%가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 2002년에 연구 하나가 흔들렸을 때 그걸 받아줄 다른 연구가 없었다. 라벨이 20년 동안 안 바뀐 것도, 의사들이 안 배운 것도, 한국어 콘텐츠가 2000년대에 멈춰 있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애초에 쌓아둔 게 적다.
가끔 상상한다. 남자들이 마흔 몇부터 십 년씩 밤마다 깨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안 돌아가고, 기분이 뒤집어지는 걸 다 같이 겪으며 늙어간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진작에 뭐가 나와도 크게 나왔을 것이다. 약도 여러 종류였을 거고, 보험도 되고, 회사마다 제도가 생겼을 것이다. 폐경 증상으로 미국에서 날아가는 근로 시간이 한 해 18억 달러어치라는 계산이 있다. 전문 진료는 이제야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는 갱년기만 보는 원격진료 스타트업들이 생기는 중이고, Midi Health, Winona 등이 유명해지고 있다. 동네 의사의 공백을 벤처가 메우는 그림이 미국답다면 미국답다.
나는 미국에서 업데이트된 라벨을 읽는 셈이다. 한국어로만 찾아봤을 때는 겁이 나서 HRT는 생각도 못 했었다.
당연히 이 글은 의학 조언이 아니다. 유방암이나 혈전처럼 개인 병력에 따라 판단이 완전히 달라지는 영역이라, 결정은 의사와 해야 한다. 다만 검색창에 어느 언어로 치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가 나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참고
- FDA, 폐경 호르몬 제품 라벨 변경 승인 (2026년 2월 12일): fda.gov
- 국내 허가된 호르몬 대체요법 제제, 서울대학교병원 약제부: dept.snuh.org
- 디비겔 허가사항, 약학정보원: health.kr
- 레지던트 폐경 진료 준비도 조사, Mayo Clinic Proceedings (2019): pubmed.ncbi.nlm.nih.gov
- 폐경 증상 지속 기간, SWAN 연구 (2015): pubmed.ncbi.nlm.nih.gov
- 1977년 FDA의 가임기 여성 제외 권고와 1993년 NIH Revitalization Act: ncbi.nlm.nih.gov
- 폐경 증상으로 인한 근로 손실 비용, Mayo Clinic Proceedings (2023): pubmed.ncbi.nlm.nih.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