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원비는 누가 내고 있었나
보험카드를 자세히 읽어본 적 있는지. 나는 없었다. 십 년을 여기 살면서 그 카드는 병원 데스크에 내밀면 직원이 스캔해서 돌려주는 물건이었다. 앞면에 로고가 박혀 있으니 내 보험은 그 회사고, 그걸로 끝이었다.
얼마 전 보험 카드를 다른 지갑으로 옮기면서 무심코 앞면을 들여다봤다. 시그나(Cigna) 로고 밑에 작은 글씨로 Shared Administration PPO라고 적혀 있었다. PPO야 알겠는데 Shared Administration은 뭔가. 공유… 행정?
예전에 쓰던 프리메라(Premera) 카드도 찾아봤다. 거기엔 아예 한 문장이 통째로 박혀 있다. Premera Blue Cross provides administrative service only and does not assume financial risk or obligation with respect to claims. 그때는 무슨 법적 고지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이게 이미 다 설명하고 있었다. 프리메라는 내 병원비에 대해 아무런 재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자기는 서류만 처리한다고 카드에 적어놓은 것이다.
미국 회사원 대부분이 모르고 사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회사에 다니면, 내 병원비를 내주는 건 보험사가 아니라 회사다. 회사가 보험사에서 보험을 사 오는 게 아니라 직원들 의료비를 회사 돈으로 직접 낸다. 이걸 self-funded(자가보험)라고 부르는데, 이름과 달리 엄밀히는 보험이 아니다. 보험은 남한테 위험을 넘기는 건데 이건 회사가 그냥 자기 돈으로 내는 거니까. 직원 수백 명만 넘어가도 흔하고, 5천 명 이상 되는 큰 회사는 거의 전부 이 방식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보험사가 가져가는 마진과 리스크 프리미엄을 회사가 직접 챙기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대신 누가 크게 아파서 청구액이 감당 안 되게 커지는 경우를 대비해 stop-loss라는 보험을 따로 든다. 보험사가 재보험을 드는 것과 비슷한 구조인 셈이다.
그럼 카드에 박힌 보험사 로고는 뭔가. 여기서 ASO(Administrative Services Only)라는 계약이 등장한다. 대형 보험사가 보험은 안 팔고 행정만 대행하는 것이다. 청구 처리하고, 병원 네트워크 대주고, 고객센터 돌리고, 카드 찍어서 보내주고. 프리메라 카드에 적혀 있던 그 문장이 딱 이 뜻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아마존 다니는 사람 보험카드는 프리메라인데 실제 돈은 그 회사 계좌에서 나간다. 직원 눈에는 일반 보험이랑 구분이 거의 안 된다. 카드에 로고 있고, 전화하면 상담원이 받고, 청구서에 그 회사 이름이 찍히니까.
구분하는 법을 찾다 보면 좀 허무하다. 나는 보험사가 아닙니다,라고 친절하게 적어주는 카드는 없다. 단서는 재정적 위험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문구다. 프리메라 카드처럼 does not assume financial risk 같은 말이 붙어 있으면 self-funded 플랜이 거의 확실하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자기가 책임지는 쪽이 아니라는 걸 밝혀둬야 하니 넣는 문장인데, 덕분에 직원이 구조를 눈치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가 된다. 반대로 내 시그나 카드처럼 상품명만 덜렁 적혀 있으면 그 이름을 검색해보는 수밖에 없다.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Form 5500을 찾아보면 된다. 회사가 주는 복지 플랜을 규율하는 1974년 연방법 ERISA(Employee Retirement Income Security Act)에 따라 회사가 베네핏 플랜에 대해 노동부에 내는 연례 보고서인데, 공개 자료라 노동부 사이트에서 아무 회사나 검색해볼 수 있다. 이직 고민하면서 남의 회사 플랜이 궁금할 때 은근히 쓸모가 있다.
그래서 지금 내 카드의 Shared Administration이 뭐였냐면, 시그나가 파는 상품 이름이었다. 행정은 독립 TPA(Third Party Administrator)가 하고 시그나는 자기네 PPO 네트워크와 병원 단가 접근권만 빌려주는 모델이다. 그러니까 이 카드에서 시그나가 하는 일은 보험이 아니라 네트워크 임대업에 가깝다. 병원들과 미리 깎아놓은 할인율, 그거 쓰게 해주는 값을 받는 것이다. TPA도 종류가 있어서 UMR처럼 유나이티드헬스케어 소유인 곳도 있고, 메리테인처럼 애트나(CVS) 계열인 곳도 있고, 얼라이드 같은 독립 회사도 있다. 카드 한 장에 회사가 몇 개나 얽혀 있는 건지 세다가 만다.
프리메라든 시그나든, 내 지갑을 거쳐간 카드 두 장 다 보험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 사람한테 설명할 때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은 건보공단이 지갑이고 심평원이 청구를 심사한다. 둘 다 국가 단위로 한 번에 돌아간다. 미국은 그 두 가지를 회사 단위로 쪼개서 한다. 지갑은 내가 다니는 회사고, 심사와 행정은 보험사나 TPA가 하고, 병원 단가는 또 네트워크에서 빌려온다. 그래서 한국에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회사들이 미국에는 산업으로 존재한다. 처음 헬스케어 인더스트리에서 일하게 됐을 때, 회사 이름 목록을 보면서 이게 다 뭐 하는 집들인지 한참 헷갈렸다. 알고 보니 저 쪼개진 조각마다 회사가 하나씩 붙어 있는 거였다.
덧붙이면, 미국에서 건강보험이 회사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원래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2차대전 때 임금 통제가 걸리자 회사들이 월급 대신 줄 걸 찾다가 보험을 복지로 얹기 시작한 게 시작이다. 역사적 우연이 팔십 년 굳어서 지금의 구조가 됐다 (으아아아아).
다음에 보험카드 볼 일 있으면 한 번 뒤집어서 읽어보시길. 생각보다 재밌는 게 적혀 있다.
참고
- 미국 노동부 EFAST에서 Form 5500 검색: efast.dol.gov/5500Search